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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황야의 이리

by leeyj. 2007. 3. 10.

황야의 이리  by  헤르만 헤세

 

 

 그 어떤 것에도 만족이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세상에 대해 이토록 냉소적이고 비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내내 어두운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하리는 스스로를 황야의 이리 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수많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매 순간마다 분열된 자아들은 대립해서 그를 끊임없이 괴롭힌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건 이성을 가지고 있으며 고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건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축복이 아니라 저주일 것이다. 스스로를 괴롭히고 죽이는 존재, 인생의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하면서 얻는 건 도대체 뭘까. 하리는 자신이 세상과 어울릴 수 없는 존재라고 규정한다. 그것은 마치 현대인이 고대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그 시대의 모든 문화, 정신, 사고방식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다. 이건 자기기만이다. 왜냐하면, 하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실존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고 냄새 맡고, 만질 수 있고, 수 많은 사람들이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걸 부정하는 방법은 스스로를 이 세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다. 하리가 원하는 건 유령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과 관계 맺지 않고, 세상 그 어떤 것과도 연결되지 않는, 그렇다면 하리는 그림자 세계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실존하는 세상을 바라보는 대신, 끊임없이 자신이 만들어 낸 망상에서 살아가는, 그걸 자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하리에게 한 소녀가 나타난다. 현실의 즐거움과 쾌락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는 하리에게 지금까지 뭐하면서 살았냐고 비웃는다. 그녀의 한 마디로 하리의 삶 전체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삶의 새로운 방식을 발견한 하리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빠져들고 만다. 헤르미네로 인해 세상과 연결된 것이다. 춤을 배우면서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인가를 절실히 깨닫는다. 그 어떤 것에도 구속받기 싫어하던 그가 가냘픈 소녀의 한 마디에 스스로 복종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향락적인 공간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아름다운 소녀와 춤을 춘다. 인생이란 사색하는 거라는 그가, 이성을 버리고 눈 앞에 보이는 쾌락에 몸을 던진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자신의 본성을 깨닫는다. 그건 아무리 예쁜 여자를 안고 있고, 마약을 하고, 춤을 춘다 해도 결코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깨달음이었다. 자신을 유일하게 이해해주는 헤르미네 에게 자신의 슬픈 운명을 고백한다. 그는 사회라는 체제에서는 결코 만족이나 행복을 얻을 수 없는 이방인이다.

 

 실존하는 사회에서 그는 마지막으로 가면무도회에 참석한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 그런데 하리는 가면속의 인물을 정확히 간파한다. 인간은 아무리 가면을 쓰고 자신을 숨기려고 해도 결코 숨길 수 없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하리는 자신이 그곳에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파블로가 건네 준 티켓을 가지고 마술극장 으로 들어간다. 그는 거기서 수없이 나눠진 자아의 분열을 인식한다. 수 많은 방들에는 각각 이름들이 있다. 자동차 사냥, 개성 형성 입문, 황야의 이리 조련의 기적, 모든 소녀는 너의 것, 사랑으로 죽이는 법 그 속에서 하리는 자신의 숨겨진 욕망의 실체를 파악한다. 일체의 모든 사회체제를 거부하고 허영과 자시과시욕에 들 뜬 인간들을 경멸하던 그 역시 똑 같은 욕망을 지닌 인간이라는 사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건 그가 이 시대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천재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들어낸 망상에 무너진 초라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의식 깊숙한 곳에 숨겨진 과거의 추억들, 아름다운 첫사랑의 기억과 수 많은 여인들과의 달콤한 사랑들, 그것조차 그의 망상일수도 있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세상과 단절된 외로운 영혼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행복할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고독을 좋아하고 외로움을 즐긴다고 해도 사람들의 관심을 기다린다.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 행복감을 느낀다. 마술극장에 들어온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리의 의식은 점점 흐려진다. 모짜르트 가 등장하는 순간 그의 망상은 절정에 다다른다. 스스로가 만든 허상과 대화를 하면서 정신분열 증세를 보인다. 그러다 결국 사랑하는(?) 헤르미네 를 칼로 죽이게 된다. 근데 문득 이것조차도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술집에서 헤르미네를 만나는 것도 스스로 지어낸 망상, 그 이후의 사건 모두…

 

 소설의 후반부는 현실이 아닌, 하리의 머리속에만 존재하는 망상을 표현하고 있다. 의식의 흐름은 카오스적인 혼란을 보여준다. 그런 혼란함을 읽어나가면서 나 자신도 의식이 흐려진다. 인간의 병든 정신세계를 이토록 극명하게 나타낼 수 있을까. 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에 의존하는 초현실적인 세계관, 마술극장 티켓에 적혀있던 글 미친 사람만 입장 가능, 입장료로 이성을 지불할 것, 아무나 들어갈 수는 없음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이성적인 세계에서 그 어떤 불합리성이 존재하지 않는 완전무결한 질서, 그 나른하고 권태로움에 지쳐 있는 현대인이라면 이 문구를 보고 순간적으로 들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미처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의 욕망들을 직시하고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 것이다. 인간정신의 복잡함을 잘 표현했지만 끝을 모르는 냉소와 비관주의는 책을 읽는 동안 나를 괴롭혔다.


P.S.  이 글은 2004년 8월 7일에 작성한 글이다. 헤세는 "데미안"이라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하리는 데미안이 성장했으면 바로 그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 전체가 상당히 냉소적이다. 그 당시의 사회를 비판한 것일까, 아니면 헤세 자신의 인생에 대한 태도를 보여준 것일까. 그렇게 읽기 쉬운 책이다. 독서모임에서 SETI님이 추천해서 읽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그리고 내용이 너무 냉소적이라 다시 읽기 싫은 책이다. 이 책도 분명 구매했는데 지금 찾아보니 없다. 이사 하면서 잃어버린 책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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