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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댈러웨이 부인 by 버지니아 울프

by leeyj. 2007. 3. 27.

댈러웨이 부인  by  버지니아 울프

 


 

핑크빛 저녁 노을 속에서 까마귀는 펄펄 날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고, 옷을 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홀을 가로질러가면서 '만약 이제 죽어야 한다면 지금이 가장 행복한 때'(셰익스피어 『오델로』 제 2 1장─역주)라고 그녀는 느꼈다. 그것이 그녀의 감정─바로 오델로의 감정이었다. 그리고 셰익스피어가 오델로에게 느끼도록 의도했던 만큼 강하게 자신이 느꼈다고 확신했다. 그녀가 하얀 드레스를 입고 샐리 시튼을 만나러 만찬에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파티를 하기로 한 어느날 아침 길을 나서면서 클라리사는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본다. 그녀에게 삶은 무엇이었을까. 거리를 지나면서 만나는 사람과 주위 풍경들을 보면서 어느덧 삶의 무의미함을 깨닫는다. 삶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행복감인 사랑하는 사람과의 일체감을 경험한 지금 앞으로의 인생은 덧없는 하루하루의 연속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스쳐간다. 클라리사의 공허함은 이 책을 읽는 나에게 더 없는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실체화될수 없는 머리속에서 만들어지는 그녀의 의식을 따라가는 과정은 정말 즐거웠다. 찰나의 순간에 그토록 많은 생각을 펼쳐 보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언제고 아주 만족스럽거나, 아주 안전하다고 느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언제라도 괴물이, 이 미워하는 마음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픈 뒤로 이 미움은 그녀 등을 후비듯이 아프게 하는 힘이 있었다. 또한 그녀에게 물리적인 고통을 주었고 아름다움이나 우정, 건강한 것, 사랑받는 것, 그녀의 집을 기쁨이 가득 찬 반석으로 만드는 일에서 느낄 수 있는 모든 즐거움을 뒤흔들고 무릎 꿇고 굴복하게 만들었다. 마치 정말로 괴물이 뿌리에서부터 파헤치는 것 같았다. 마치 만족스러워하는 이 모든 차림새가 이기적인 사랑에 지나지 않는 것 같았다! 이 미움!

 

 버지니아 울프는 41살에 호주머니에 돌을 집어놓고 물에 빠져 자살했다고 한다. 소설속의 클라리사는 울프의 분신이다. 그녀는 왜 삶을 어둡게 바라보게 됐을까. 여성으로 살아가면서 부딧치는 장애들,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한 남자의 아내로만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 대한 절망감 때문이 아닐까. 그런데 어느순간 클라리사가 겪는 고통에 반감이 생겼다. 왜냐하면 사실 그녀는 현실을 비관해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젊은 시절에는 이지적인 외모로 남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자신을 속박하지 않고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남자와 결혼했고, 경제적으로 아무런 어려움 없이 하녀들이 집안일을 다 해주고 파티가 있을 땐 지적이고 우아한 여주인의 모습을 보여주면 되니까 말이다. 킬먼 양은 그런 클라리사에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출한다.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그녀의 허영심과 자만심을 경멸한다. 그녀가 지금의 위치에 오게 된건 그녀의 육체 때문이고, 그걸 가지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는 모습이 너무나 안쓰럽다. 클라리사의 고통이 절실하게 와닿지 않는 진짜 이유는 그것이 너무나 주관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나 셰익스피어는 인류를 미워했는지─옷을 입는 것, 아이를 낳는 것, 입과 배의 더러움! 이것이 이제는 셉티머스에게 밝혀졌다. 말의 아름다움 속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였다. 한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위장해서 물려주는 비밀 신호는 혐오감, 증오, 절망이었다.

 

 또다른 주인공 셉티머스를 통해 울프는 고통의 원인을 개인에서 사회로 확장시킨다. 클라리사에 비해 셉티머스의 고통은 실체화 되어 있으며 이유가 명확하다. 전쟁은 인간의 정신을 황폐화시킨다. 순수한 영혼을 지닐수록 강도는 더 커진다. 일상생활의 모든 것들이 공포로 다가온다면,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것에 자신을 잃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어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가장 인상깊었던 건 정신병원에 가둘려고 찾아온 의사를 피해 난간에서 떨어져 자살하는 장면인데,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죽음을 선택하는 역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힘든 걸까. 너무나 나약한 인간본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고 하지만 결국 현실 도피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도 바보들이야, 빅토리아 거리를 건너며 그녀는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늘만이 아시기 때문이지, 왜 우리가 삶을 그렇게 사랑하는지, 왜 삶을 그렇게 보는지, 구성하고, 하나를 중심으로 쌓아 올리고, 무너뜨리고 그리고 매순간 새롭게 삶을 창조하는지 말이야.

 

 삶에 대한 공허감과 두려움에도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 삶의 의미를 발견하는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 찾아내야 한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의 사건에서 기쁨을 발견하고,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어야 한다. 파티에서 전혀 모르던 남자의 자살소식에 전이되서 창문을 바라보면서 갈등을 하지만 결국 현실로 돌아오는 클라리사를 보면서 희망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P.S.  2005.4.9  작성한 글이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스토리 전개 와 분위기가 너무 좋았다.  원작 소설은 지금은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난다.  2년밖에 안 지났는데 머리가 나빠졌나...  책을 산건 아닌거 같고, 도서관에서 빌린거 같다.  버지니아 울프 당시의 사회는 여성들에게 가혹한 세상이었던 거 같다. 그런 면에서 요즘 사회는 여성들에게 어떻게 인식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