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by 루이제 린저
인간이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삶에 대한 열정을 느끼게 된다는 건 지독한 역설이 아닐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본능적으로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게 아닐까.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라 언제나 그 속에서 존재하고 있다는 걸. 소설 속의 니나는 죽음에 대한 동경을 갖고 있는 여자다. 나는 종종 죽음을 꿈꾸었지요, 니나는 계속 말한다. 나는 죽는다는게 어떤 것인지 예감하고 있어요. 한번은 내가 죽는 꿈을 꾸었지요. 그것은 끔찍한 공포로 가득 찬 순간이었어요. 마치 목을 졸리고 찢기고 짓눌리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그것은 한순간뿐이었고, 그 다음에 온 것은 말할 수 없이 좋았어요. 나는 아주 밝아지고 가벼워져서, 마침내는 은빛 공기로 만들어진 공 같은 것이 되었어요. 아주 황홀한 기분이었어요. 그러나 그 다음에 나는 잠에서 깨고 말았어요. 오, 그날 아침잠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너무나 불행했어요. 나는 벽들과 천장과 바닥이 있는 이 방에서 나무와 새털로 된 침대, 내 침대 속에 누워 있었던 거예요. 무한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 알고 난 뒤에 내가 육체를 가지고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었어요. 니나는 죽음을 자유와 동일시하고 있다. 죽음을 통해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데 왜 답답한 육체속에 갖혀서 인생을 살아야 하냐고 반문하고 있다. 소설 내내 니나의 이런 태도는 한 남자에게 속해서 안정된 삶을 사는 대신 끊임없이 위험속에서 자신을 내던지고 있다. 니나에게 인생은 수많은 가능성이 있으며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을 자유로움의 세계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여성의 주체성 보다는 위험에 찬 인생을 살아가면서 겪는 고통의 무게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하고 언제나 위험한 열정에 매달려 왔으며 양극단을 오가는 감정의 불안함은 스스로를 힘들게 한다.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만 할까. 그것을 운명이라고 부르기에는 니나의 삶은 너무나 주체적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동했으며, 사랑이라는 이름의 구속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는 꿈 속에서 어떤 피막속에 갇혀 있었어요. 유리가 아니면 면사포 같은 것으로 된 아주 얇고 투명한 피막 속예요. 나는 몸을 구부리고 그 속에 서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려고 했어요. 맹렬하게 나오려고 한 게 아니라, 다만 동경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누군가 말을 했어요. 이 얇은 피막이 너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 . 그 목소리는 나를 무엇으로부터 갈라놓고 있는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어요. 밖에는 뭔가가 있었어요. 자유, 아니면 평화, 아니면 예지…… . 아, 난 그걸 뭐라고 이름지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쨌든 그것은 내가 찾던 것, 내가 필요로 했던 것, 내가 그리로 가야 하는 것이었어요. 우리도 역시 그렇지 않을까. 지금의 인생이 만족스럽지 않고 뭔가 결핍되어 있다는 느낌. 눈에 보일 듯 하지만 잡히지 않는 것. 지금 날 구속하고 있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자유, 평화, 예지 이런게 과연 존재하는 걸까. 삶이란 결코 실현되지 않을 이상을 향한 여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니나가 언제나 위험을 추구하고 죽음을 동경한다면 그 반대편에는 슈타인이 있다. 그는 안정을 추구하고 죽음의 순간까지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로맨티스트 이다. 니나는 그에게 견딜수 없는 고통과 삶의 희열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그는 평생을 니나 만을 바라보며 사랑하지만 언제나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 결벽에 가까운 그의 성향은 그들 사이의 완벽한 내면의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순간마다 번민에 휩싸이고 괴로워한다. 그는 그것을 광증이라고 표현한다. 나는 행복했다. 정말 이 순간에는, 이 시간동안 몹시 행복했다. 그리고 갑자기 미칠 듯한, 말할 수 없이 멋있는 유혹이 나를 휩쌌다. 왜 우리는 이 시간, 둘 다 행복하고 기쁨으로 해서 다른 생각은 모두 잊어버린 이때, 둘이 함께 삶을 끝마칠 수는 없는 것인가? 이날처럼 모든 것이 조화를 이룬 날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고, 매일매일은 다만 손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더 속력을 내어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고, 나무 기둥, 무덤, 갑자기 종말이 오겠지. 니나는 완전히 거기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를 것이다. 나는 니나를 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바람에 불그레한 빛을 띠었고, 머리는 나부끼고, 눈은 빛나고 있었다. 니나는 나의 눈길을 느끼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니나의 기쁨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 여자에게는 다만 착하고 좀 거북스러운 친구에 지나지 않았다. 그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랑이 한 인간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을수 있다는 것에서 슬픔과 연민을 느꼈다. 도대체 왜 이토록 한 여자에게 집착하는 걸까. 슈타인에게는 니나만이 인생을 살아가는 의미로 보인다. 언제나 머리속은 니나 생각으로 가득차 있다. 지식인의 전형으로 보여지는 슈타인이 사랑의 광증을 앓는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운명적인 사랑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의해 기분이 좌우되며, 그/그녀에게 사랑을 받는것만이 인생의 가치라고 믿게 되는 것. 슈타인은 죽는 순간까지 니나만을 그리워 한다. 니나 속의 무엇이 그토록 슈타인의 마음을 잡았던 걸까. 결합을 회피한 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리움과 두려움이 오랜 세월 동안 심한 투쟁을 거듭해왔다. 이 비겁하고 괴로운 싸움에서 내가 풀려나려면, 불치의 병에 걸리거나 죽음이 가까이 왔다는 확신이 필요했다. 10년 전 나는 지금처럼 나 자신을 잘 몰랐고, 그때 나는 나의 맹렬한 폭발이 니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의 본질의 특수한 방향으로의 발전과 인식을 위한 투쟁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나 자신의 본질 가운데 어떤 가능성을 선택할 것인가가 문제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내가 부정하려고 했던 나의 본질 가운데 어느 부분과 가능성의 구현이 니나가 아니었을까? 슈타인은 자신에게 다가왔던 기회를 거부해 왔다. 니나와의 사랑의 결실을 말이다. 그건 처음부터 불가능했다. 왜나하면 슈타인은 니나를 사랑한 게 아니라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삶에 대한 생명력을 사랑했던 것이다. 니나가 한 남자에게 귀속되서 평범해지는 순간 더 이상 니나를 사랑할 수 없게 되버리는 것이다. 이런 역설은 슈타인을 평생동안 괴롭혔다. 나에게는 슈타인이 고결한 로맨티스트가 아닌 아무런 도움도 안되는 관념에 사로잡힌 기만적인 인간으로 보여진다. 죽음의 순간에서의 깨달음이란 것도 사실 그 자신이 전부터 알고 있는 것이 아니었던가.
니나의 언니인 마르그넷은 관찰자이면서 동시에 니나로 인해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인생의 가치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니나의 질문은 나를 당황하게 했다. 적당한 대답을 찾아내려고 애쓰면서, 나는 내가 결혼하고 몇 년 후부터는 한번도 이 문제에 관해서 정말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무렵, 나는 물론 때때로 스스로에게 물어 보곤 했다. 이것이 ‘행복’인지를, 그러나 나는 불행하지 않았고 인생에 대해서 지나치게 요구하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내가 행복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언제나 위험스럽고 자유를 동경하는 니나와 그녀를 평생 사랑해 온 슈타인, 니나와는 정반대의 성향을 지닌 할, 니나의 자유로운 영혼을 이해하는 알렉산더, 니나로 인해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마르그넷, 소설 속의 등장인물들은 인생이 보여줄 수 있는 수많은 부분들이다. 난 여기서 어떤 부분을 택해야 할까. 어쩌면 그건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한가지로 고정된 게 아니라 수시로 변하는 인생의 전환점에서 중요한 건 결단을 내리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건 다양한 경험일 것이다.
P.S. 이 서평은 2004년 11월 18일에 작성했다. 독서모임에서 알게 된 친구가 아주 재밌다고 추천해서 읽게 됐는데, 사랑에 대해서 많은걸 생각하게 했다. 지금도 집에 책이 있는데, 언제 시간되면 한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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