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관 옆 철학까페 - 부성애의 본질
김용규 교수는 철학의 생활화를 위해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리고 현재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를 통해 철학사상을 투영시키려는 시도를 한다. 그래서 이 책에서의 철학사상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매그놀리아” 라는 영화를 통해서 부성애의 본질을 철학적으로 규명한다. 첫 단락을 칼 세이건의 [잃어버린 조상의 그림자]의 인용으로 시작하는데 아이를 가진 어머니의 시점에서 짐승 같은 남자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있다.
… 남자들은 때때로 아이들을 돌보거나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남성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 젊은 남자 중 한 명은 자신의 어머니와 성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 어머니는 결코 원치 않았다. 며칠 이내 그 젊은이는 어머니에게 심각한 상처를 입힐 것이다. 누이와는 성교할 수 있다. 그러나 어머니만큼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흥분이 시작되면, 자신을 억제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친다. …… 때로는 남자들이 이성을 잃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곁에 있다는 이유에서만 아이들을 죽여 버리는 일도 있다.
너무나 편파적이지 않은가. 도대체 이 문장을 인용한 이유가 뭘까. 이 문장을 읽으면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인간이 본능으로 사는게 대단한 잘못인가. 게다가 남자들을 무슨 성욕에 미친 짐승으로 묘사하고 있다. 난 이게 틀렸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이걸 인용한 의도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거다. 물론 유인원의 시각으로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현대적 관점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남자는 본성적으로 야만적이라는 단정적인 표현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굴욕적인 유사성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라는 말이다. 바로 이어서 제레드 다이아몬드 교수의 [제3의 침팬지] 를 인용하는데, 혼외 정사는 남성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의 문장과 논점이 일치하지 않는다. 내가 왜 이걸 지적하느냐 하면, ‘매그놀리아” 라는 영화를 통해서 철학적으로 부성애의 본질을 밝히겠다는 의도는 상당히 좋다. 영화를 보면 사회적으로 성공했지만 가정을 파괴한 남자들이 등장하고 죽음을 앞두고 자신들의 과거를 후회한다. 여기까지 보면 이런 논점도 일리가 있지만 아이들의 정신적 방황의 원인이 아버지만의 탓이었을까. 저자는 이 책을 통해서 한결같이 인간을 자연적인것과 구별되는 정신적 존재로 격상시키고 그걸 이루기 위한 도구로 철학을 사용한다. 인간의 행동양식을 철학적 규범속으로 환원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난 오히려 가정 폭력이나 범죄가 고도로 문명화된 사회가 되면서 억압된 본능이 표출된 것이라고 본다.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기껏해야 3만 5천개의 유전자를 가진 포유류에 불과한 존재이다. 저자의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은 어쩌면 당연할수도 있지만 책 전체에 흐르는 도덕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부자연스럽다.
…인간이란 초극되어야 할 그 무엇! 인간을 초극하기 위해서 그대는 무엇을 하였는가? 원래 만물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초극하여 그 어떤 것을 만들어 왔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밀물이 다시 썰물이 되기를 원하며 인간을 초극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짐승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하고 있다. 인간에 있어서 저 원숭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다만 웃음거리일 뿐 아니면 비참한 굴욕? 그대들은 구더기에서 인간으로의 길을 걸어 왔도다. 그러나 그대들 속에는 아직도 많은 것들이 구더기로 남아 있도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다. 그러나 그대들은 아직도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인 것이다.
… 불합리한 권위에 대한 싸움에서 어린이가 패배함으로써 남겨진 상흔은 모든 노이로제의 밑바닥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흔들은 하나의 증후군을 형성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그 사람의 독창성과 자발성을 약화시키거나 마비시키는 것이다. 자아는 약화되어 거짓된 자아가 그것을 대신하게 되며 그러한 속에서 나는 존재한다라는 의식이 무디어져 타인들의 기대에 대한 총체로서 자아를 경험하는 것으로 바뀌어진다. 즉 자율성은 타율성으로 대체되며 모든 인간 상호간에 생기는 체험은 혼미성을 띠게 되거나 혹은 H.S.설리반 의 말을 빌리자면 병렬적 성질을 띠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 자신과의 투쟁에서 패배의 가장 중대한 증상은 죄책감이다. 만일 사람이 권위주의의 그물망을 뚫고 나가는데 성공하지 못한다면 도피하고자 했던 헛된 시도는 죄의 증거가 되는 것이며 따라서 또다시 복종함으로써만 비로소 떳떳한 마음을 회복시킬 수가 있다.
난 이 챕터에서 이 부분이 가장 맘에 든다. 영화속 갈등상황의 원인을 명쾌하게 지적한다. 그러니까 클라우디아, 프랭크, 도니의 강박증을 어린시절의 노이로제로 해명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의 퀴즈천재 프랭크는 “난 장난감이 아니예요. 인형도 아니고요.” 라는 말로 자신의 주체를 회복한다. 난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철학보다는 정신분석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밀레르에 따르면 주체는 그의 담론에서 '결여되어 있는 요소'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자리를 잡아주는 일종의 대리인을 세워놓고 주체가 자리를 비운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주체는 거기에 결여되어 '있으므로' 완전히 부재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클라우디아는 어린시절 아버지의 성추행으로 타인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 결여된 욕망은 마약남용과 락음악을 통해 해소한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다. 자신의 모든 욕망을 이해해주는 아버지를 만날 때 비로써 잠시 떠나있던 주체가 자기 자리를 찾아온다. 그리고 그 역할은 규범을 잘 지키고 자상한 짐 이라는 경찰관이다.
G.마르셀은 신이 천지를 창조하고 “……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한 것은 단순한 판단이 아니고 경이이며 찬탄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버지가 그의 아이를 기뻐하는 것도 그것이 판단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고 경이와 찬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러한 ‘아버지다움에 대한 바람’에 의해서만 남자는 아버지가 될 수 있는 것이며, 어떤 원숭이보다 더한 원숭이들 모여 사는 그래서 ‘달아날래야 달아날 수가 없는 고통의 늪’ 인 가정은 ‘시원적 우리’, 곧 ‘공동존재’를 통해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드러나는 신비의 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치고는 너무 허무하다. 이게 근원적 해결책이라고,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모든게 해결될 정도로 세상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지나치게 추상적이다. 좋은 말이긴 한데 가슴으로 와 닿지 않는다. 저자는 인간성에 대해서 낙관적인 것 같다. 뭐 그것도 좋다. 하지만 나는 이런식의 해답이 마치 교사가 아무것도 모르는 학생에게 인생의 가르침을 주는 것처럼 느껴져서 거부감이 든다. 어쪄먼 나에게는 철학이 맞지 않은건지도 모르겠다. 도덕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노력, 가치있는 인생을 살기 위한 지침서, 정신을 표현하는데 있어서의 불명료함. 이런 것보다는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인간, 분자수준으로 환원할 수 있는 인간 정신,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거라고는 하나도 없는 명료함을 갖춘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낀다.
P.S. 이 글은 2004년 10월 8일에 작성했다. 독서모임에서 이 달의 책으로 선정돼서 읽었는데, 각자 원하는 부분을 선택해서 해당되는 영화를 보고 서평 작성을 했다. 그당시 구매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찾아보니까 없다. 이사하면서 없어진 모양이다. 어려운 철학사상을 영화를 통해 설명하는 방식인데 흥미있는 책이다. 그래도 내용 자체는 상당히 어렵다. 해당 철학자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대출 받아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 당시에는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생각을 했었는데 요즘은 많이 안이해진거 같다. 독서모임을 다시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긴 하는데 사람 구하는게 문제다. 아니면 나 혼자서 시간 나는 대로 틈틈히 공부해야겠다. 올해는 해야 할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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